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민음사, 2010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p.15
지난해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말하자면 영원히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특권을 지닌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오만하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p.16
그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런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도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p.17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사랑해 본 사람이라면 좀처럼 잊기 힘든 어떤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즉 노래하고 싶은 충동, "자, 한번 들어봐요." 하는 속삭임, 방금 즐겁고 신나는 일을 했으며 곧이어 또 즐겁고 신나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약속이 실려 있었다. p.27
"이제 이 주만 지나면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 돼요." 그녀는 밝은 얼굴로 우리 모두를 바라보았다.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날을 줄곧 기다리다가 막상 그날이 오면 깜박 잊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나요? 나는 언제나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날을 기다리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아요." p.30
"운전 솜씨가 형편없군요. 좀 더 조심하든가, 아니면 아예 운전을 하지 말든가 해야겠어요." 내가 다그쳤다.
"조심하고 있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겠죠."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 사람들이 비켜 갈 게 아니냔 말이에요." 그녀는 계속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고가 나려면 양쪽 다 실수를 해야 한다고요."
"만약 당신처럼 부주의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요. 난 조심성 없는 사람을 끔찍이도 싫어하거든요.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 있지요." 그녀가 대답했다.
뜨거운 햇빛에 긴장한 그녀의 잿빛 눈은 곧장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잠깐 동안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p.9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본 덕목 중 적어도 한 가지는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도 그러한 덕목이 있다. 즉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정직한 사람 중 하나이다. p.91
데이지와 톰은 차디차게 식은 프라이드치킨 한 접시와 흑맥주 두 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식탁 건너편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진지한 태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이따금 데이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 다 치킨이나 흑맥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 광경에는 분명 자연스러고 친밀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고, 만일 누가 그 모습을 본다면 그들이 함께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개츠비는 내가 아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조용합디까?"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아주 조용하네요. 집에 돌아가 좀 눈을 붙이는 게 어때요."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데이지가 잠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싶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형씨."
그는 윗도리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마치 내가 옆에 있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불침번에 모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쪽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가 달빛 아래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지켜보도록 남겨 둔 채 나는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p.205-206
그녀는 자기 삶이 지금 당장 어떤 형태를 갖추기를 바랐다. p.213
어느 새 롱아일랜드에 새벽이 밝아 왔고, 우리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아래층의 나머지 창문들을 모두 열어젖혀 집 안을 잿빛과 황금빛 햇살로 가득 채웠다.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가 불쑥 이슬 위에 드리워지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유령 같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대기에는 느릿하고 상쾌한 움직임 같은 것이 있어서 서늘하고 좋은 날씨를 예고하고 있었다. p.214
데이지의 집이 다른 집보다 늘 신비롭고 유쾌해 보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비록 그녀가 떠나 버리고 없었지만 이 도시 역시 우수에 잠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을 떠나면서 좀 더 열심히 찾아보았더라면 아마 데이지를 찾아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일반실 객차는 - 이제 그의 호주머니에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 푹푹 쪘다. 그는 객차를 연결하는 복도로 나가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았다. 정거장이 천천히 미끄러져 뒤로 물러나고 낯선 건물들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기차가 봄 들판으로 나오자 잠시 동안 노란 전차 한 대가 경주라도 하듯이 나란히 달렸다. 전차에 탄 사람들은 우연히 거리를 지나다가 데이지의 하얗고 매력적인 얼굴을 한 번쯤은 보았을지도 모른다.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었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는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215-216
그 사건을 하도 되풀이해서 말하는 바람에 마침내 그 일이 자신한테도 현실감을 잃어 더 이상 할 말조차 없어져 버리고, p.220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도 새로운 구경꾼들이 계속 정비소 앞으로 들이닥쳤고, 윌슨은 정비소 안의 긴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한동안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정비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문을 닫아 주었다. p.220
전화 한 통 오지 않았지만 집사는 낮잠까지 거르면서 4시가 되도록 기다렸다 - 비록 전화가 걸려 왔다 해도 받을 사람이 없어진 지 한참 시간이 지난 뒤까지도 기다렸다.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걸려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장미꽃이란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또 거의 가꾸지 않은 잔디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생경한지 깨달으면서, 무시무시한 나뭇잎 사이로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틀림없이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현실감이 없으면서 물질적인 새로운 세계, 가엾은 유령들이 공기처럼 꿈을 들이마시며 되는대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새로운 세계…… 형체도 없는 나무를 헤치고 그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저 잿빛 환영처럼.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