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마리아스, 새하얀 마음
Javier Marias, 『새하얀 마음 Corazon tan blanco』, 문학과지성사, 2015
"My hands are of you colour ; but I shame to wear a heart so white."
ㅡ 셰익스피어
위 문장을 번역하면,
"제 두 손은 당신과 같은 색깔이에요. 하지만 전 새하얀 마음을 가진 게 부끄러워요." p.차례 앞
지금은 그 셰익스피어의 인용 문구가 『맥베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문구는 맥베스가 잠자고 있던 던컨 왕을 살해하고 막 돌아왔을 때 그의 부인이 한 말이다. 그것은 갖가지 주장들, 말하자면 단편적인 문장들의 일부다.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저질러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사건을 대수롭게 않게 여기도록 개입한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You must not think so brainsickly of things'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번역하기 어려운데, 'brain'은 '머리'를 의미하고, 'sickly'는 이 문장에서 부사로 쓰였지만 '병약한', 혹은 '아픈'이란 뜻이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그녀는 그에게 그토록 아픈 머리로, 혹은 그토록 골치 아프게 그것들을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날 영국 정상이 인용한 문장이 이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 인용구를 『맥베스』에서 따왔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더라도, 우리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아니면 떠올리는 것이다). 또한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말은 그의 무기이고 도구이다. 말은 폭풍우가 지나간 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빗방울은 언제나 같은 곳에 떨어져 땅을 연약하게 만들고 끝내 땅속으로 파고들어 구멍이 뚫리고 물길까지 생긴다. 타일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배수구로 사라지는 수돗물 방울과는 다르며, 얼마 가지 않아 흐름이 끊기는 핏방울과도 다르다.
302호
박*정
빗소리가 귓바퀴에 모래알처럼 쌓여
우리는 담배가 떨어졌어
이제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야 할 시간, 언젠가 읽다 덮은 소설처럼 시선을 거두고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이럴 줄 알았다면 새로 산 스웨터를 입고 멋진 작별 인사를 연습해 두는 건데
고장 난 짐승처럼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지 멍청한 우리는 입을 벌리고
아름답구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요상하고 아름답구나
의미 없이 혼잣말을 들려주는 일이 좋아서
어릴 적 오빠에게 맞던 기억이나 동생이 연못에 빠졌던 기억들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들려주듯
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창밖엔 청동구름
불 꺼진 방에서 물을 마시면
입안에서 벌레가 춤추는 기분을 아니
어디선가 들리는 아코디언 소리
크리스마스가 오고 우박이 떨어지고 그 해의 마지막 아이가 죽으면 가엽고 따뜻한 이곳에는 흔적만 남아
어젯밤 당신은 인간의 말을 버리고
짐승의 음성으로 울어주었는데
인간적인 마음으로
서로의 손을 쥐고 돌아서는 시간
당신이 내 발가락을 핥을 때
잠이 깨면 좋았을 텐데
내가 가진 고기는 부드럽고 부드러워
두 손이 붉게 물들 때까지
주여, 우리를 한 입에 삼키소서.
핏방울은 손이나 수건이나 붕대나 때로는 물로 그 흐름이 끊긴다. 아직 의식이 있고 자해한 것이 아니라면, 피를 흘리는 사람 자신의 손만으로도 가능하다. 피나는 것을 막으려면 구멍 난 배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 된다. 귀에다 혀로 속삭이는 것은 키스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을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키스다. 때로는 저항하는 상대를 누그러뜨리는 것은 눈도 손가락도 입술도 아니라 면밀히 탐색하여 무장해제시키는 혀다. 속삭이며 키스하는, 강요하는 혀다. 듣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곧 안다는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에는 들려오는 소리를 본능적으로 차단하는 눈꺼풀 같은 것이 없으며, 이제 듣게 될 말을 미리 예측하여 조심할 수도 없다. 언제나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다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를 부추기기만 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인이 발생한 직후에 그 살인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돌아온 남편의 입에서 'I have done the deed', 즉 '내가 그 일을 했소', 혹은 '내가 그 행동을 저질렀소'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비록 'deed'는 요즘 '업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 행동 혹은 일 혹은 업적에 대한 고백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를 진정한 공범으로 만든 것은 남편을 부추겼다는 사실도 아니고, 사전에 현장을 미리 준배해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범행에 협조한 것도 아니고, 왕의 시종들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갓 살해된 시체를 보러 사건 현장에 다녀온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공범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범행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행위의 중요성을 덜어내고 싶었다. 아마도 두 손을 피로 물들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맥베스를 진정시키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알게 된 내용을 최소화하여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든 자와 죽은 자는 그림에 불과해요.' '그토록 병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의 고귀한 힘을 잃어버리게 돼요.' '이런 식으로 그 일을 생각하지 말아요. 그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리고 말 거예요.' '그 생각 때문에 그렇게 지쳐버려선 안 돼요.' 이 마지막 문장은 그녀가 결연히 나가더니 시종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그들의 얼굴에 죽은 자의 피를 ('만일 그가 피를 흘린다면......') 묻히고 돌아와 남편에게 한 말이다.
'제 두 손은 당신과 같은 색깔이에요.' 그녀는 맥베스에게 말한다. '하지만 전 새하얀 마음을 가진 게 부끄러워요.' 만일 여기서 '하얀'이라는 표현이 '창백하고 두려움에 질린' 혹은 '겁에 질린'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그녀는 던컨의 피를 자신에게 묻힌 대신에 자신의 평안함을 남편에게 전염시키고자 한 것 같았다. 그녀가 알고 있었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개탄하거나 아무리 그렇게 했다고 확신하더라도 그녀가 그 범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죽은 자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은 장난이고 흉내이며, 살해한 자와 거짓으로 연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두 번 죽일 수도 없고 그 사건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I have done the deed'에서 누가 '나'인지는 절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맥베스 부인이 살해된 던컨의 가슴에 다시 비수를 꽂더라도 그를 죽인 것도 아니고 죽이는 데 기여한 것도 아닐 것이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다. '물로 씻으면 우린 깨끗해질 거예요' (혹은 아마도 '우릴 말끔하게 할 거예요'). '이번 행위로부터'라고 그녀는 맥베스에게 말한다.
그녀 자신은 그럴 수 있다는 걸, 말 그대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그녀는 그에게 동화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그녀에게, 그녀의 새하얀 마음에 동화되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나눈다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결백함, 혹은 비겁함을 나누도록 애쓰는 것이다. 부추김은 말에, 번역할 수 있는 말에 불과하다. 그 말은 주인 없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이 세기에서 저 세기로 이어지며 반복된다. 언제나 똑같은 말은, 이 세상에 사람이 존재하기 전부터, 언어도 없고 들을 귀도 없을 때부터 똑같은 행위를 부추겨온 것이다. 그 동일한 행위들이 저질러지길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행위들은 그 어떤 의지와도 관계없다. 행위들은 실현되는 순간부터 이제 말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말을 지워버린다. 행위들은 이전과 이후로 고립되어 버린다. 행위들은 유일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말에는 중복과 취소, 반복과 수정이 있고, 반박될 수 있고 상충될 수 있다. 말은 변형되고 잊힌다.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잘못이다. 그건 피할 수가 없다. 비록 법은 말한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의 잘못을 눈감아주지는 않지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구나 자신의 혀를 상대방의 귀에 대고 강요했더라도, 자신의 가슴을 상대방의 등에 대거나 숨을 몰아쉬면서 한 손을 상대방의 어깨에 올린 채 이해하기 힘든 속삭임으로 설득하고자 했더라도,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9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