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적은육지/하비에르 마리아스

하비에르 마리아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흰운동화 2017. 1. 19. 11:52

Javier Marias,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Manana en La batalla piensa en mi』, 문학과지성사, 2014




아마도 그날 밤의 온당치 못한 내 출현을 합당하고 당연하게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고 따라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열한 행위였다.


즉 무엇보다도 사건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었고, 과거의 삶을 조작하거나 단순한 정황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p.224



우리는 잠자코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그때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2,3분 동안 데안은 마치 나에 관해 무언가를 안다는 듯이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자기 앞에서는 아무런 비밀도 간직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필요 이상으로 말하게 만드는 의뭉스런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말이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신뢰받을 수 없다고 느끼게 하면서, 자신의 말이 의심당하지 않고 반박당하지 않도록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게끔 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데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더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p.213



그는 거실로 돌아와 다시 선반에 기대더니 내가 아직 그 누구도 아니었을 때 식당에서 나를 쳐다본 것과 똑같이 나를 바라보았다. p.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