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적은육지/조르조 아감벤

조르조 아감벤, 비유와 왕국

흰운동화 2017. 1. 20. 10:26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할 길』, 책세상, 2016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도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p.41


비유로 말하는 이유가 듣는 사람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예수는 이와는 명백하게 모순되는 말을 덧붙인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숨겨둔 것은 드러나고 감춰진 것은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수사학적 차원에서 고대인들에게 비유는 내용을 알면 안 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암호화된 이야기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비밀을 오히려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p.42


예수는 유사한 것으로 비유된 왕국과 세상의 연관성이 일종의 근접성이라고 말하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 차원의 가까움뿐만 아니라 동시에, 무엇보다도, 공간적 차원의 근접성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늘 나라가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당연히 마지막에 등장해야 할 하늘의 왕국이 본질적으로는 '가까이' 있으며 마지막이 오기 이전의 것들과 가까이 있고, 비유에서처럼 그것들과 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국이 무언가와 닮았다면 그것은 동시에 무언가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후'는 무언가와 가깝고 닮은 형태를 지닌다. p.43



한때 신의 곁에 가까이 머물렀던 이들, 그리고 이어서 그를 기억하며 살아가던 이들은 이제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서로에게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 드높은 곳에 계신 분까지도

  저 위에서 얼굴을 돌리신다.

  하늘에서도 푸른 지상에서도

  불멸하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어서 횔덜린은 근심 가운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일관성을 잃지 않고 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기억 속에서 사라진 뒤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은 "하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비유다. 


  씨 뿌리는 자의 모습은

  가래로 씨를 취해

  흔들어 뿌리는 것이니


하지만 이 비유의 해석은 이어서 독특한 방식으로 전복된다. 횔덜린은 씨앗이 사라지고 하늘 나라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실 나쁜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발 앞에 바구니를 떨어뜨리지만

  결국 곡식은 그에게 돌아온다.

  무언가를 잃었어도,

  말씀의 생생함이 사라져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이제 횔덜린이 보호해야 하는 것은 영적 의미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그러나 모두를 다스리는

  아버지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이 그대로 굳건히 보전되고

  존재가 올바르게 이해되는 것이니


하늘 나라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면 기억 속에서 사라질 운명에, 이해되지 못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말씀을 보호하려는 노력에서부터 노래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독일의 노래가 이어진다." 여기서 하늘 나라의 말씀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적 조건으로 대두된다. p.50-52



카프카의 유고 중에 <비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단상이 있다. (...) 제목 자체는 글의 주제가 비유에 관한 비유라는 느낌을 주지만 (...) 이 짧은 글의 내용은 정확하게 반대되는 이야기, 즉 비유에 관한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현실과 비유를 구분하는 데만 주력하는 사람은 비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비유가 된다는 말'은 하늘 나라의 말씀과 하늘 나라 사이에, 말과 현실 사이에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전히 하나의 비유라고 믿는 두 번째 화자는 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스스로 '말'이 '비유'가 되는 사람에게는('말'이 '비유'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표현의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너무 가까워서 '저쪽으로 가지' 않고서도 도달할 수 있는 곳이 하늘의 왕국이다. p.52-55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영적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응할 뿐이다. 신비로운 의미는 문자가 논리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으며 이해와 동시에 일어나는 의미의 변모, 즉 또 다른 의미의 폐지에 불과하다. 문자를 이해한다는 것, 사람이 비유가 된다는 것은 비유 안에서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는 "우리가 왕국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열어 보인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비유는 언어에 관한 비유, 즉 여전히 항상 우리의 이해 대상으로 남아 있는, 말하는 존재로서의 우리에 대한 비유다.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말들의 의미, 말들의 모든 모호함과 미묘함을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왕국, 즉 하늘 나라의 근접성과 세상과 왕국의 유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하늘 나라가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과 너무 가깝고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왕국의 근접성은 하나의 요구이며 세상과 왕국의 유사성은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말이 우리에게 비유로 주어진 것은 사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좀 더 가까운 곳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얼굴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거나 누군가의 손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좀 더 가까이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하는 것, 예를 들어 "주여 어서 오소서 Marana tha"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p.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