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이수명, 세상의 모든 노이즈를 경유하려는 듯이, 현대시, 2016 3월호
요는 계량화와 전문화, 추상화 속으로 현상을 끌어들이는 일의 무기력함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유가 갖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안전대를 설치하고 나면 우리는 더더욱 현상의 돌발성과 멀어지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사실은 생각 속으로 들어서면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을 방어하는 일은 생각의 요새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무장 해제시키는 일이다. 즐비하고 너절한 세속의 피상적 노이즈와 혼음하는 때만이 우리는 삶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알 수 없는 삶에 막연히 닿아 있을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이탈리아의 위대한 법학자 사타는 판결이 지닌 이러한 자기 준거적인 성격으로부터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한 바 있는데, 그러한 결론 중 하나가 처벌은 판결에 후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결 자체가 처벌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더 나아가 모든 처벌은 판결에 내재한다고, 처벌의 특징을 이루는 행위(감금, 처형)는 그것이 말하자면 판결의 수행인 한에서만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Satta, 1994: 26). 이것은 또한 "무죄 판결은 사법의 오류를 자인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내면적으로 무죄"라는 것을, 하지만 오로지 참으로 무죄인 사람은 "무죄 방면된 사람이 아니라 살면서 아무런 재판도 받지 않는 사람"(같은 책, 27)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수십 년간 아우슈비츠를 철저히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개념적 혼동에 대한 책임은 저 재판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재판들은 불가피했지만, 또 충분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아우슈비츠 문제가 이미 극복되었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판결은 이미 내려졌고 유죄는 최종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지성이 번뜩이는 순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법이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지 않았음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제 자체가 법 자체를 문제삼을 만큼, 그리하여 법 자체를 파멸로 끌고 갈 만큼 엄청난 것임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