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의 방 - 밤. 이제 광활한 모래밭 위 밝은 하늘에서 별들이 빛난다.
피트 몬드리안, 몬드리안의 방, 열화당, 2008
관조하는 것, 혹은 조형적 시각을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불변하는 것과 보편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지각하게 할수록, 비지속성, 개인주의 등 우리의 외부와 내부에 있는 인간적인 사소한 것들 모두는 점점 더 중요성을 잃어갑니다. 사실상 미적인 관조는 인류에게 추상적이고 의식적인 방법으로 보편적인 것과 하나가 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모든 관조 ㅡ 쇼펜하우어의 용어인 무관심한 관조 ㅡ 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연적인 상태를 초월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상태와 조화를 이루어 자기 개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합니다. 그의 정신적인 열망들이 그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을 얻는 데 실패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미적 관조의 순간에 그러한 개인적인 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색채와 선을 통해 조형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모든 회화의 본질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회화가 보편적인 것의 조형적 결정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면 자연의 외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의 작용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은 더욱 의식적이 되고, 그에 따라 더욱, 분리된 관조의 순간들을 하나의 순간, 즉 영원한 관조로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P.32
이미 말했듯이 근본적인 관계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생생한 현실로 경험할 수 있다면 복수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단일한 수평선과 하나의 수직선의 형태로 근본적인 관계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하나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고립되어 표현된 근본적인 관계는, 최소한 인간인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의해 대략적으로 결정된 하나의 전체성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새로운 조형은,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표현은 그 어떤 것도 거부하려고 합니다. 보편적인 것을 경험하고 관조하기 위해서 독립적인 전체성은 모두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조형이 근본적인 관계의 표현을 지속적으로 방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별들로 가득 찬 하늘에서 하나의 관계가 다른 하나의 관계에 의해 중립화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 하늘이 달빛 하늘보다 더 강하게 조화로움을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복수성은 또한 우리 인간들에게 삶의 조형적 표현인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리듬은 모든 특별한 것들을 단일성으로 합병시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것들의 다수성은 어느 정도 사물들의 변덕스러움을 파괴하는 자연주의적인 리듬을 형성합니다. 반면 근본적인 관계의 다수성은 그것의 절대성을 파괴하는 좀더 내적인 리듬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과거의 조형과 새로운 조형 사이의 틈을 강조하지요. 즉 자연주의 회화의 임무는 작품을 리듬을 강조하는 것이었던 반면, 새로운 미술은 가능한 한 자연적인 리듬을 없애려고 합니다. 새로운 조형에서, 리듬은 아무리 내적인 것이라 해도 항상 현재적이며, 근본적인 관계 즉 위치의 관계가 표현되는 크기의 다양성에 의해서조차 다양해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조형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리듬을 생생한 현실로 만듭니다. P.32-33
별들은 점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별로 없고 근본적인 관계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요. 최소한 우리가 추상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보통의 시각으로는 고립된 별을 빛나는 점으로 식별하기 어렵지요.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해요. 보편적인 것에 대해 무엇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죠. 보통의 시각에서는 점이 관계를 표현하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의 개인성을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바로 이러한 개인성이지요. 그것은 형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이 아니라 점들을 보고, 이러한 점들은 형태를 창조합니다. 두 개의 점 사이에 선이 조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점들과 더 많은 선들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은 우리에게 불규칙하게 강조된,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어떤 별이 다른 별보다 더 밝게 빛나기 때문이죠. 별들의 다양한 밝기는 다시 한 번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별들의 성운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단지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서 우리가 그것을 자연적 외양으로 지각할 때 형태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P.33
하나의 점이 불명확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많은 빛의 점들은 다른 불명확한 공간을 명확한 것으로 만듭니다. 보통의 시각에서 그것들은 관계를 나타내는데, 균형잡힌 관계를 감추고 있는 형태, 즉 기하학적 형태로만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인 배치를 넘어서 본다면, 우리는 곧 이러한 관계를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변화무쌍한 크기의 관계 속에서 별과 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지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순수하게 표현된 평형상태를 보기 위해 조화롭게 조직된 질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자연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조형적으로 그 내부에 고유의 기하학적 형태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기하학은 직선 혹은 곡선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직선은 곡선에 가장 강하게 긴장감을 주며, 그래서 더욱더 '자연적인' 것을 갖게 됩니다. 많은 곡선들이 지금 별이 있는 밤하늘에서 식별될 수 있습니다. 즉 그 곡선들은 여전히 별이 있는 밤하늘을 '자연스럽게' 만드는데, 그럼으로써 그것의 자연적인 속성을 폐지하고 조형적으로 그 가장 내적인 힘을 생성시키기 위해 직선을 강화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술에서든 아니면 단순히 의식적인 관조에서든, 우리는 곡선적인 것을 직선적인 것으로 감축시켜야 합니다. P.36
자연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한 자연을 굳이 예술로 나타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은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지요. 예술가가 표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좀더 완벽하게 보기 위해 자연적인 외양을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닌가요?)
일반적이고 직접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시지각(視知覺)의 유형이 있어요. 주로 사물들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지요. 그래서 한 마리의 말은 그대로 한 마리의 말입니다. 이러한 사물 중심의 시각은 그것이 우리의 개별적인 인간 사고의 외부에 여전히 머무는 한에만 진실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좀더 주관적인 시각이 있는데, 그것은 주로 제한된 인간 사고에 의해 결정되지요. 이러한 유형의 시각은 그것이 미성숙한 단계일 경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숙해지면 객관적인 시각으로 복귀되며, 주관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객관적인 시각은 자연주의적으로 편향된 사람에게도 진실한 것이 됩니다. 즉 그에게도 불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은 내적으로 보면 볼수록 더 심오한 불변성을 봅니다. 그에게 모든 사물은 똑같이 아름답지요. 왜냐하면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포함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더 정신적으로 깊이를 가진 사람은 모든 사물을 똑같이 완벽한 것으로 봅니다. 특별한 표현이 더 이상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죠.
그는 이 점에서, 모든 사물들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ㅡ 그러나 간헐적으로 여전히 사물의 다른 점이 드러난다고 ㅡ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어째서 새로운 조형이 특별한 주제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아직도 주로 자연적인 쪽에 치우쳐 있어요. 그리고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 안에서 절대적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외양을 원하지요. 반면, 불완전한 외양은 이러한 시각을 방해해요. 우리의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 변덕스러움은 이미 많이 감소되었고, 그래서 절대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손쉽게 촉진시킬 수 있는 거지요.
(이제 예전에 당신이 어떻게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 주제들은 결코 자연을 자체의 변덕스러운 양상으로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을요. 그럼 항상 절대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일종의 강박적 충동을 느껴 왔나요?)
절대적인 것이 우리 자신, 그리고 모든 사물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면, 그 자체로 명백해지는걸요. P.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