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의 방 - 도시의 빛과 대조되는 짙은 어두움을 배경으로 교회의 정면이 보인다.
피트 몬드리안, 몬드리안의 방, 열화당, 2008
추상이란, 명확성으로 이끄는 내적인 힘을 말합니다. 혹은 정신적으로 고양된 것이라면 외적인 것도 고차원적인 단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러하 건물 정면의 여러 요소들에서 보이는 명확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즉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형태들 중 어느 것도 추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개척은 항상 개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나서 그룹에 의해 실행됩니다. 이미 새로운 조형의 목적을 나타내는 몇몇 건축물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전체 도시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오랜 동안 우리의 환경은 추상적인 리얼리티가 부족할 것이니다. 그것은 추상-실제 회화가 이 시대를 위해 우리의 모델로 남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의 도시와 마을들에 대해 불만을갖고 있군요?)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특히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개인적인 감정이 매우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것은 물론 좀더 큰 도시의 건물들에서도 나타나긴 하지만, 모든 것이 좀더 쉽게 집단(덩어리, 주요부, 일반대중)으로 용해되어 들어갑니다. 시간에의 속박이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강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순수 기능성의 아름다움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지요.
(그러나 순수하게 유용한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순수 기능의 아름다움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많은 사물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가 마시는 컵도 아름답고 자동차와 비행기도 아름답지요. 그리고 우리 시대의 것들만 인용하더라도, 현대 공한 기술에 의한 다리, 공장 등 금속이나 콘크리트로 된 많은 아름다운 작업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건축가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아름다움을 부과하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비록 아름다움을 향한 의식적인 조형탐구가 고차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미에 대한 의식적인 추구는 많은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조형표현이 아닌 한, 차라리 유용성에 국한시키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이것을 순수하게 실행함으로써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삶에 대한 관심은 곧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술도 따지고 보면 삶에 관계하는 것이 아닌가요? 정확히 말해,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술은 기분 좋게 하거나 멋있게 보이기 위한 욕구, 혹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 등 때문에 본래의 길을 벗어나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