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그들의 분류표에 따르면
흰운동화
2017. 2. 23. 11:23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문학동네. 2016
식당 창가에 서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라헬은 한때 외할머니의 피클 공장이었던 건물의 녹슨 양철 지붕을 비가 두드려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라다이스 피클&보존식품.
공장은 저택과 강 사이에 있었다.
피클, 스쿼시, 잼, 카레 가루, 파인애플 통조림을 생산하던 곳이다. FPO(식품협회)에서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바나나 잼이 잼도 젤리도 아니라며 금지시킨 이후에도 (불법으로) 생산하기도 했었다. 젤리라기엔 너무 묽고 잼이라기엔 너무 되군. 분류할 수 없는 애매한 농도야, 하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의 분류표에 따르면.
이제 와서 돌아보니 자기네 가족이 어려움을 겪은 이 분류라는 문제는, 잼이냐 젤리냐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고 라헬은 생각했다.
어쩌면 암무, 에스타, 그리고 그녀가 그런 분류 기준을 벗어나는 최악의 경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그들 모두 규칙을 어겼다. 모두 금지된 땅에 발을 들였다. 모두 법을 어겼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법칙을. 그리고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할머니를 할머니로, 삼촌을 삼촌으로, 어머니를 어머니로, 사촌을 사촌으로, 잼을 잼으로, 젤리를 젤리로 만드는 그 법칙을.
외삼촌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애인이 되고, 사촌은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시절이었다. P. 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