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피크닉
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2, 민음사, 2013, ebook
그녀는 그의 사진을 단 한 장 가지고 있다. 흑백 사진. 그녀는 이 사진을 조심스럽게 보관한다. 그녀가 지닌 그와 관련된 유품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그녀와 그 남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다. 뒷면에는 연필로 "피크닉"이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도 아닌 그냥 '피크닉'. 그녀는 이미 이름을 알고 있고, 그래서 적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나무 아래 앉아 있다. 분명 사과나무였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 소매를 팔꿈치까지 말아 올리고 넓은 치맛자락으로 무릎 부근을 감싸고 있다. 더운 날이었다. 사진 위로 손을 갖다 대면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아직도 감지할 수 있다.
그 남자는 옅은 색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는 반쯤 그를 향한 채로, 그 이후로는 어는 누구에게도 지어 본 기억이 없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너무나 앳되어 보인다. 그 또한 웃고 있지만, 카메라를 막아 내듯 자신과 카메라 사이에 손을 치켜들고 있다. 마치 미래에 그 두 사람을 돌아보고 있는 그녀를 밀어내듯. 마치 그녀를 방어하듯. 그의 손에는 담배꽁초가 끼워져 있다.
혼자 있을 때 그녀는 사진을 다시 꺼내서 탁자 위에 뉘어 두고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녀는 세세한 부분들을 모두 살펴본다. 그의 흐릿한 손가락, 하얗게 바랜 그들 옷의 구김, 나무에 달려 있는 설익은 사과들, 전경의 죽어 가는 풀밭.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
그 사진은 잘린 것이다. 3분의 1가량이 잘렸다. 왼쪽 하단에는 손목 부분이 잘린 손이 풀밭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른 한 사람의 손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항상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 모든 것을 기록할 그 손.
나는 어쩌면 그렇게 무지했던가? 그녀는 생각한다. 그토록 어리석고 그토록 눈멀고 그토록 경솔했다니. 그렇지만 그런 무지함과 경솔함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면, 그다음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파멸하게 될 것이다. 신처럼 영락하게 될 것이다. 돌이 되어 버릴 것이다. 결코 먹거나 마시거나 웃거나 하지 않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다 가라앉아 버렸다. 나무도, 하늘, 바람, 구름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진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 p.678-681
내가 너에 대한 몽상에 잠기곤 한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어느 날 저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네가 거기 서 있을 것이다. 너는 검은 옷을 입고 있고, 요즘 사람들이 모두 핸드백 대신 들고 다니는 작은 배낭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오늘 저녁처럼 비가 내리지만 너는 우산을 안 들고 있다. 너는 우산을 경멸한다. 젊은이들은 비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것을 즐기니까. 그것이 활기를 돋워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는 현관에, 축축한 빛이 어렴풋이 비치는 가운데 서 있을 것이다. 너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는 젖어 있을 것이고, 네 검은 옷은 흠뻑 젖어 있으며, 빗방울이 네 얼굴과 옷에서 장식용 금속 조각처럼 빛날 것이다.
너는 노크를 하고 나는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는 발을 끌며 복도를 따라 내려가 문을 열 것이다. 내 가슴은 마구 뛰고 파닥거릴 것이다. 나는 너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내 알아볼 것이다. 내가 간직해 오던, 내 마지막 남은 소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혼자 생각하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날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너를 환영하고 네게 팔을 벌리고 네 뺨에 입맞춤을, 아주 가볍게 할 것이다. 자제력을 잃는 것은 보기 흉한 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도 몇 방울 흘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몇 방울만. 늙은이의 눈은 건조한 법이다.
나는 네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너는 들어올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사는 내 집과 같은 곳의 문턱을 넘는 것은 젊은 여자에게 권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화석화된 조그만 집에 혼자 살며 붙나는 거미줄 같은 머리와 뭐가 뭔지 모를 것으로 가득 찬 정원을 가진 늙은 여자, 노숙한 여자. 그런 사람에게서는 유황 냄새가 살짝 풍긴다. 너는 나를 약간 무서워할질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의 모든 여자들처럼 너는 약간 무모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들어올 것이다. "할머니." 너는 입을 열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마디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버림받은 사람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탁자에, 나무 숟가락과 나뭇가지 화환과 불을 붙인 적이 없는 초 사이에 너를 앉힐 것이다. 너는 몸을 떨 것이고 나는 네게 타월을주고 담요로 감싸주고 코코아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네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식탁에 앉아 내가 네게 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무슨 기적으로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섞어 놓은 종이 더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p.687-690
전쟁이 끝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입자가 굵은 연회색과 중간 색조는 사라졌다. 그 대신 현란하고 원색적이고 그늘 없는 정오의 광휘가 다가왔다. 진한 분홍색, 폭력적인 파란색, 붉고 흰 비치볼, 형광 녹색 플라스틱,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쬐는 태양.
읍과 시의 외곽 주변으로 불도저가 사납게 돌진했고, 나무들이 쓰러졌다. 땅에는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거리는 자갈과 진흙투성이였다. 벌거벗은 흙이 드러난 가운데 가냘픈 묘목만 심겨 있는 잔디밭이 나타났다. 가지가 늘어진 자작나무가 많이 보급되었다. 하늘이 너무 많이 보였던 것이다.
고기가 넘쳐났다. 커다란 조각과 두툼한 부위와 큰 덩어리가 푸줏간 창문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처럼 밝은 오렌지와 레몬이 있었고, 설탕 더미와 산같이 쌓인 노란 버터가 있었다. 모든 이들은 먹고 또 먹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구할 수 있는 모든 총천연색 고기와 총천연색 음식으로 잔뜩 배를 채웠다.
그러나 내일은 있었다. 내일밖에 없었다. 사라진 것은 어제라는 시간이었다. p.654-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