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스완네 집 쪽으로2, 민음사
지난 해 어느 저녁 파티에서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 ㅡ 그는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다. ㅡ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잘 알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영역이 좁은,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인상이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말하자면 '시네 마테리아'(sine materia. 무실체 無實體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루스트는 독일 낭만주의 미학의 영향을 받아 '관조는 신비주의적인 감동과 흡사한 것으로 무한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장단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만일 기억이, 마치 파도 한가운데에 견고한 토대를 쌓는 일꾼처럼 이 빠져나가는 악절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음에 오는 악절들과 대조하고 구별하게 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액체성'과 '뒤섞임'으로 계속 모티프들을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모티프들은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따금 솟아오르다 이내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그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에 의해서만 지각될 뿐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즉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처럼 스완이 느꼈던 감미로운 감각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기억은 곧 그 감각에 대해 간략하고도 일시적인 복사본을 마련해 주었지만, 악절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지나치게 그 복사본에 눈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똑같은 인상이 갑자기 되돌아왔을 때 이미 그 인상은 포착할 수 없어지고 말았다. 스완은 그 인상의 넓이와 대칭적인 배열, 문자, 표현적인 가치를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이미 순수 음악이 아닌 데생이나 건축, 사상과도 흡사한 그런 것을 보았다. 이제야 그는 음향의 파도 위로 잠시 솟아오른 악절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악절은 금방 그에게 특별한 쾌락을, 그것을 듣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쾌락을 줬는데, 악절 외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악절에 대해 미지의 사랑과도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
악절은 느린 리듬으로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고결하고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떤 뚜렷한 행복 쪽으로 그를 항하게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미지의 악절이 도달한 지점, 그가 악절을 따라가려고 마음먹었던 그 지점에서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더욱 빠르고 가늘고 애절하고 끊어짐 없고 부드러운, 새로운 움직임으로 미지의 앞날을 향해 그를 데리고 갔다. 그 후 악절은 사라졌다. 스완은 악절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세 번째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악절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예전처럼 분명하게 말을 건네지 않았고 강한 쾌감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악절이 다시 필요했다. 마치 거리에서 얼핏 스친 여인이 그의 삶에 새로운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깃들게 해 그의 감수성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미 사랑하게 된 그 여인의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나게 될지 어떨지도 모른는 것처럼.
그러나 이 악절에 대한 사랑은 스완에게 한순간 새로운 젊음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그는 어떤 이상을 향한 목적에 자신의 삶을 전념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데 그치고 있었으므로, 물론 그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그의 정신이 더 이상 고귀한 관념을 품지 않게 된 후부터는, 그런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믿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으로 도피하는 습관을 얻었다. 사교계에 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닌지도 묻지 않고, 대신 초대를 승낙한 이상 꼭 그곳에 가야 하며 만약 방문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중에 명함이라도 꼭 두고 와야 한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할 때에도,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은 진지하게 말하지 않고ㅡ 어떻게 보면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자신의 실제 능력은 보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물질적이고 세부적인 것만을 말하려고 애썼다. 그는 요리법이나 화가 출생일과 사망일, 그리고 화가의 작품 목록에 대해서는 지극히 정확했다. 때때로 어쩔 수 없이 어떤 작품이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판단해야만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어떤 냉소적인 어조를 덧붙였다.
마치 병약한 사람들이, 그들이 도착한 고장이나 다른 식이요법, 때로는 자연발생적이고 신비로운 기관의 변화 덕분에 그들 병이 좋아진 것처럼 보여, 뒤늦게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는 그 뜻하지 않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되는 일이 있는데, 스완도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가 들은 악절의 기억 속에서, 또는 다시 한 번 나타나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던 소나타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중 하나가 존재함을 발견하고, 마치 그를 괴롭히는 정신의 메마름에 음악이 일종의 친화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 현실에 거의 자기 삶을 바치고 싶은 욕망과 힘을 다시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곡이 누구 작품인지를 아무리 해도 알 수 없었고, 또 악보를 손에 넣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는 그 곡을 잊어버렸다. 그와 함께 그날 저녁 파티에 참석했던 몇몇 사람들은 그 주에 다시 만나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개는 음악이 끝난 후 도착했거나 끝나기 전 빠져나갔으며, 또는 연주하는 동안 그곳에 있긴 했지만 다른 방에서 이야기를 했거나, 남아서 들었다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보다 더 잘 들었다고 할 수 없었다. 집 주인으로 말하자면 그 곡은 그들이 부른 음악가들이 요청한 신곡이라는 정도만 알았다. 음악가들은 이미 순회 공연을 떠났고, 그래서 스완은 그 곡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에겐 음악가 친구가 많았고, 악절이 그에게 준 그 특별하고도 번역 불가능한 기쁨을 상기하면서, 악절이 그렸던 형상들을 눈앞에 떠올렸지만, 그 악절을 결코 친구들에게 읊조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악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p.4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