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슈니츨러, 『꿈의 노벨레』, 문학과지성사, 1997
슈니츨러 문학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정신분석학의 거두 프로이트였다. 그의 눈에 비친 슈니츨러는 자신이 학문적인 관찰을 통해서 어렵사리 도달한 것을 언어 예술로 승화시킨 '심층 심리의 탐구자'였던 것이다. p.9
제6장
시청 탑에서 일곱시 반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의 눈앞에 넘쳐 있어서 오히려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무것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벼운 동정심을 느꼈다. 확고한 결심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당장 마차를 집어타고 아무 기차 정거장으로 가서 이곳을 훌쩍 떠나버릴 생각이 머릿속을 문득 스쳤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기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단 사라졌다가 훗날 그 어딘가 낯선 땅에 다시 나타나서, 여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는 정신병리학 책에서 읽었던 진기한 환자의 사례, 소위 이중 실존을 살았던 환자가 기억났다. 어떤 한 사람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사라져 아예 실종되었고, 몇 달 후인가 아니 몇 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지만, 그 사이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스스로는 기억해내지 못했고, 그 후, 그 어딘가 멀리 떨어진 외국에서 그를 만났던 누군가가 그 사람을 알아봤지만, 고향에 다시 돌아온 이 사람은 정작 그 사람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아주 드문 것이지만 어쨌든 실지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런 것을 경험한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단지 이보다는 훨씬 약화된 형태로 경험했을 것이었다.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개 되는 것을 예로 들면 어떨까? 물론 보통의 경우에는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해내겠지……그러나 모든 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거야. 곧바로 까맣게 잊어버려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분, 비밀스럽게 몽롱한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꿈도 분명 있으니까. 아니면 훗날에 아주 먼 훗날에야 비로소 그 꿈을 기억해내지만, 이것이 실제로 체험했던 일인지, 아니면 단지 꿈을 꾸었던 일인지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분간해내지 못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단지 꿈이었다고 ㅡ 그저 꿈에 불과한 사건이라고 여겨버리니 ㅡ!
그는 이런 생각 속에 빠져 길을 걸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도중에 그가 빠져든 곳은 어둡고,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한 골목 근처였다. 그는 바로 그 골목에서 아직 스물네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어떤 타락한 여자의 뒤를 따라 초라하긴 해도 아늑한 그녀의 숙소로 따라 들어갔었다. 그래, 말로 하자면 타락했다, 그거지, 바로 그 여자가? 그리고 바로 이 골목길은 소위 평판이 좋지 못하다. 그것 아니겠어? 사람들은 얼마나 실체 없는 말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있는지, 길거리, 운명,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말을 붙여놓고, 실체 없는 그 말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버리는 거야. 그가 지난 밤 이상한 우연으로 자리를 같이 했던 모든 여자들은 그 근본에서 비교해본다면, 그 중에서 바로 이 어린 창녀가 가장 우아한 여자, 정말로 가장 순수한 여자가 아니었을까, 정말 그렇지 않을까? 그녀를 마음속에 떠올려보자 그의 가슴이 뭉클하였고, 그는 어제 저녁 자신이 굳게 마음먹었던 결심을 다시 기억해내고 순식간에 결정을 내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게에서 갖가지 먹을 것을 구입했다. 자그마한 봉지를 들고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지금 자신은 적어도 이성적인, 아마도 칭찬을 받아도 아깝지 않은 해동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고, 마음속으로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p.137-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