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반지의 제왕 서문

J.R.R. 톨킨, 반지의 제왕, 씨앗을뿌리는사람

 

 

현실의 전쟁은 전설 속에 진행되고 있던 전쟁이나 그 결말과는 닮은 데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전설의 전개에 암시를 주고 지침을 제시했다면, 반지는 분명히 탈취되어 사우론에 맞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우론도 멸망당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을 것이며, 바랏두르도 파괴되지 않고 점령당했을 것이다. 반지를 차지하는 데 실패한 사루만은 당대의 혼란과 배신 속에 모르도르에서 자신의 반지학 연구에서 빠져 있던 연결고리를 발견했을 것이며, 자칭 가운데땅의 지배자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의 위대한 반지를 곧 만들었을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양측은 모두 호빗들을 증오와 멸시로 대했을 것이며, 호빗들은 노예로도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알레고리나 시사적 언급을 좋아하는 이들의 취향이나 생각에 따라 다른 식의 각색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방식이든 알레고리는 정말로 싫어하며, 나이가 들어 그것의 존재를 간파할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러워진 뒤로는 항상 그렇게 해 왔다. 나는 독자들의 사고와 경험에 대해 다양한 적용 가능성을 지닌 역사를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더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은 '적용 가능성'과 '알레고리'를 혼동한다. 전자는 독자의 자유에 근거하고 있지만, 후자는 작가의 의도적인 지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경험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맹아가 경험이라는 토양을 활용하는 방법은 엄청나게 복합적이고, 또 그 과정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는 기껏해야 부적절하고 애매모호한 증거로부터의 추측에 불과하다. 작가와 비평가의 생애가 서로 겹칠 때 두 사람이 공유하는 사고의 흐름이나 당대의 사건들이 당연히 가장 강력한 영햘력이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겠지만 이 또한 잘못이다. 사실 전쟁의 억압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전쟁의 그림자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에 1914년을 만났다는 것(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 1939년(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후의 몇 년을 겪는 것 못지 않게 끔찍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젠 종종 망각된다. 1918년경, 나의 친한 친구들은 하나를 빼고 모두 죽고 없었다.(톨킨과 그의 친구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대부분 프랑스 솜므 전쟁터의 대규모 참호전에서 전사했다.) 아니 조금 덜 슬픈 예를 들자면, '샤이어 전투에서 이야기를 끝마치던 시점이 영국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 않다. 이 장은 작품에서 성장해 온 사루만이란 인물에 의해 마지막에 수정되긴 했지만 처음부터 예상했던 필수적인 플롯의 일부로, 분명히 말하지만 아무런 알레고리적 의미나 당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암시는 담고 있지 않았다. 이 장은 사실 불분명하고 또 훨씬 먼 옛날의 경험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라는 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형편없이 파괴되고 있었다. 자동차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나는 한 대도 본 적이 없다.) 겨우 교외에 철도를 건설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최근 나는 어느 신문에서 한때 번창하던 물방앗간과 그 옆의 연못이 퇴락한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오래 전에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들이었다. 나는 젊은 방앗간지기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방앗간 노인인 그의 부친은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그의 이름은 까끌이는 아니었다. P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