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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그가 죽기로 마음먹었던 날의 이야기

ㅇㄷㅇ, <ㅎㅂㅁㄹ>, ㄹㅌ, 2018/10-11

 

 

기원은 잠시 웃었어.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그가 죽기로 마음먹었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어.

"나는 그때 해변에 누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지펴 놓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그 불이 꺼지면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미련이나 두려움은 전혀 없었고 아주 맑은 정신으로 그 결정을 인지하고 있었지. 해가 지고 모래와 바다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 모닥불 근처로 몇몇 사람들이 몰려 왔어. 손바닥을 불쪽으로 내밀며 온기를 쐬고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렸어. 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했는데 연습을 하는 것인지 서툰 솜씨로 한 곡만 계속 불어댔어. 끝나면 곧장 다시 시작하고 끝나면 또 다시 시작했어. 나는 돌아 버릴 지경이었지. 무한히 반복되는 멜로디가 귓가에 파고들며 무늬를 그리는 것 같았어. 그 사람들이 어서 가 버리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그들은 가지 않았어. 불 근처에 앉거나 천천히 주변을 걸으면서 계속 거기 있었어. 내게 말을 걸지도 않고, 심지어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것처럼 자기들끼리 웅얼웅얼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언가를 나눠 먹으면서 거기에 계속 머물렀어. 그러다 나는 잠이 들어 버린 거야. 깨어났을 땐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어.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봤어.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그 사람들도 해변을 떠난 후였지. 그리고 나는 내 마음속에 타오르던 죽음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어. 갑자기 죽음은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사람들이 그저 머물며 존재하며 나에게 작용한 신비로운 일에 대해 생각했어. 해변에는 빛도 온기도 다 사라진 후였지만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는 여전히 남아 있었어.  p.15-16